데미안

2019. 7. 7. 08:26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위의 구절로 유명한 책.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성장통에 대한 이야기 정도 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으니 다르게 해석이 되서 재밌었던 책.

새가 알을 깨뜨리고 어디로 가느냐?
그건 바로 압락사스.
새가 결국 기존의 세계관을 깨뜨리고 가는 곳이 신과 악마를 모두 갖고 있는 압락사스란다.
이 책에서 기존의 세계관이란 선 만이 참인 기독교 세계관이고 동시에 주인공을 키워낸 낡은 규범들-아버지, 집, 종교, 도덕의 속박이다.
자신의 거짓말이 족쇄가 되어 불량청소년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주인공은, 갑자기 나타난 데미안에게 구원을 받는다.
데미안은 '카인과 아벨'이야기에서 카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들려주며 주인공을 일깨운다.
그 해석이란 요약하자면 카인은 용감한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 옆의 두 도둑에 관한 다른 해석도 결국
회개치 않은 도둑이 비겁하지 않아서 더 용감하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데미안에게 바로 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낸다.
이것은 기존의 세계에 머무르려는 주인공의 몸부림이었다.
주인공이 기존 세계관을 버렸을 때, 데미안을 다시 만났고, 데미안의 모친인 에바부인에게 인도된다.
에바부인은 이브이고 데미안은 데몬을 연상시킨다는 해설을 보고 나는 태초의 인간 아담이 생각났다.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
데미안은 기존의 세계관을 깨라고 속살거린다.
이 속삭임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압락사스'가 선과 악을 모두 갖고 있는 양면성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데미안이 압락사스라고 생각되는 건 나뿐이려나?
주인공 싱크레어는 데미안 덕분에 자기 자신을 찾았지만, 신(기존의 규범-아버지, 집, 종교, 도덕)은 잃었다.

p75~77 예를 들면 나비 종류 중에는 어떤 나방들이 있는데, 암놈이 수놈보다 훨씬 수가 적어. (중략)
그런데 연구자들이 자주 시험해 본 바로는, 이 나방들 중에 암컷이 하나 있으면 밤에 이 암컷에게로 수나방들이 날아오는데, 그것도 여러 시간 떨어진 곳에서 오는 것야, 여러 시간 떨어진 곳에서! 생각해 봐! 몇 킬로미터 밖에서 부터 이 모든 수컷들은 그 지역에 있는 단 하나의 암컷을 감지하고 추적해 오는 거야! 그것을 설명하려고들 하지, 그러나 그건 어려워. 그건 일종의 후각이거나 아니면 그런 무엇일 거야. 이를테면 좋은 사냥개가 눈에 뜨이지 않는 짐승 자취를 찾아내어 따라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이해하겠지? 그건 그런 일들이야, 자연은 그런 일로 가득 찼고, 아무도 그걸 밝힐 수 없어. 이런 말은 할 수 있겠지. 이 나방들에게서 암컷이 수컷처럼 흔했더라면, 수컷들의 코는 그렇게 예민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야. 수컷들에게 그런 예민한 코가 있는 것은 다만, 스스로를 그렇게 조련시켰기 때문인 거야.
어떤 짐승이나 사람이 자신의 모든 주의력과 모든 의지를 어떤 특정한 일로 향하게 하면, 그는 그것에 도달하기도 하지. 그게 전부야. (중략)
예를 들면 그런 나방이 자신의 뜻을 별이나 뭐 비슷한 곳까지 향하게 하려 했다면, 그건 이룰 수 없는 일이겠지. 다만 나방은 그런 따위 시도는 안해. 나방은 자기에게 뜻과 가치가 있는 것,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 자기가 꼭 가져야만 하는 것, 그것만 찾는 것야.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일도 이루어 지는 것지. 그는 자이 외에는 다른 동물이 갖지 못한 마법의 제6감을 개발하는 거야! 우리 같은 사람은 동물보다는 활동의 여지가 더 많을 것이고, 관심도 더 크겠지. 그러나 우리도 얼마만큼은 정말 좁은 테두리에 매여 있어서 그걸 벗어날 수 없어. 상상 같은 건 해볼 수 있지, 이런 저런 상상의 날개를 펼 수는 있겠지, 꼭 북극에 가고 싶다라든지, 혹은 그런 무엇을. 그러나 그걸 수행하거나 충분히 강하게 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소망이 내 자신의 마음속에 온전히 들어 있을 때, 정말로 내 본질이 완전히 그것으로 채워져 있을 때뿐이야. 그런 경우가 되기만 하면, 내면으로부터 너에게 명령되는 무엇인가를 네가 해보기만 하면, 그럴 때는 좋은 말에 마구를 매듯 네 온 의지를 팽팽히 펼 수 있어. 예를 들면 내가 지금, 우리 신부님이 장차 안경을 안 쓰시도록 힘써 봐야겠다고 한다면, 그건 안 될 일이야. 그건 그냥 장난이야. 그러나 내가, 그때 가을처럼, 저 앞에 있는 내 의자에서 자리를 바꾸어야 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게 되면, 그럴 때는 아주 잘되지. 그때 아파벳순으로 보아 내 앞에 앉아야 되는데 지금껏 아파서 등교하지 못해 자리가 없던 아이가 갘자기 나타났어. 그리고 누군가가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줘야 했고 물론 내가 그렇게 했지. 내 의지가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즉시 기회를 포착한 거지.

p142  우리 영혼도 일찍이 인간 영혼들 속에 살았던 모든 것을 지니고 있지. 그리스인들이나 중국인들에게서든 아프리카 토인에게서든 일찍이 존재했던 모든 신과 악마, 모두가 우리들 속에 함께 있어. 거이 있는 거야. 가능성으로, 소망으로, 탈출구로.

p163 우린 인간이야. 우린 신을 만들고 신들과 싸우지. 그러면 신들이 우리를 축복해.
:

라틴어수업

2019. 6. 30. 10:29

#라틴어수업
#한동일
#흐름출판

한국인 최초, 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 로타 로마나가 설립된 이래, 700년 역사상 930번째로 선서한 변호인, 광주가톨릭대학교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2000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2001년 로마 유학길에 올라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에서 2003년 교회법학 석사학위를 최우등으로 수료했으며, 2004년 동대학원에서 교회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과 로마를 오가며 이탈리아 법무법인에서 일했었고 서강대학교에서 라틴어 강의를 맡아 진행했다.

이력만봐도 정말 대단한 사람.
제목이 라틴어수업이라 어려울 것 같아서 읽고 싶지 않았던 책인데, 예상 외로 자기개발서 같은 책이었음.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인격이 높은 것을 느꼈는데, 자기수양이라고 해도 좋을 교육과정으로 자신을 연단 해서 그런 듯.
책에서 살며시 스며나오는 가난과 인내와 끈기를 느낄 수 있었음.
신달자씨는 100겪었다면 200으로 느끼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은 반면, 이분은 자신의 가난과 고통과 인내를 과장하지 않고, 잘 드러내지도 않지만, 그런 것이 바탕이 되어 인격을 높이는 듯했음.

p16 Non tam praeclarum est scire Latinum quam turpe nescire.
논탐 프래클라룸 에스트 쉬레 라티눔 쾀 트루페 네쉬레.
라탄어를 모르는 것이 추하지 않은 만큼 라틴어를 아는 것도 고상하지 않다.

p45~46 우리는 아이들이 한글을 빨리 깨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른 나이에 외국어 교육도 받게 합니다. 하지만 자기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은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타인의 생각 또한 이해할 수 없고, 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어요.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밀어붙이느라 바쁘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화부터 내는, 서로 저마다 다른 말을 하는 광경을 주위에서 자주 봅니다. 그것은 결국 외국어의 문제로 확대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국어로 안 되는 건 외국어로도 안 됩니다. 게다가 모든 언어 공부가 결국 시험으로 귀결됩니다. '언어'를 알기는 아는데 그 언어를 '제대로 쓸 줄'은 모른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소통의 도구로서의 언어는 배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배가 항구에 정박되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항구를 떠나 먼 바다로 나가면 크고 작은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해요.
어쩌면 그것은 배가 지나간 자리에 생기는 물거품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배와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보아야 하는데 물거품을 보는 데서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죠. 이는 정작 메세지를 읽지 않고 그 파장에 집중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오해가 쌓이고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p47 어려운 외국어를 할 줄 아는가가 대단한 게 아닙니다. 외국어로 유창하게 말할 줄 알지만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유명 인사의 강변보다, 몇 마디 단어로도 소통할 줄 아는 어린 아이들의 대화 속에서 언어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p56 지식, 즉 '어떤 것에 대해 아는 것' 그 자체가 학문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앎의 창으로 인간과 삶을 바라보며 좀 더 나은 관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 점이 바로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배운다"라는 말에 부합하는 공부의 길이 될 겁니다.

p215 사람마다 자기 삶을 흔드는 모멘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힘은 다양한 데서 오는데 그게 한 권의 책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한 장의 그림일 수도 있고, 한 곡의 음악일 수도 있습니다. 또 이렇게 잊지 못할 장소일 수도 있고요. 그 책을 보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알았기 때문에, 그 그림을 알았기 때문에, 그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그 장소를 만났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눈뜨게 되고 한 시기를 지나 새로운 삶으로 도약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모멘텀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을 겁니다.
:
◀ PREV | 1 | ··· | 4 | 5 | 6 | 7 | 8 | 9 | 10 | ··· | 301 | NEXT ▶

BLOG main image
by 팜츄리

공지사항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602)
시아준수 (52)
상품리뷰 (101)
책리뷰 (271)
민사,신청서류 양식 (3)
기타 뻘글 (23)
음식점 리뷰 (53)
대충레시피 (38)
드라마리뷰 (53)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

달력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otal :
Today : Yesterd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