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2019. 7. 7. 08:26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위의 구절로 유명한 책.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성장통에 대한 이야기 정도 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으니 다르게 해석이 되서 재밌었던 책.

새가 알을 깨뜨리고 어디로 가느냐?
그건 바로 압락사스.
새가 결국 기존의 세계관을 깨뜨리고 가는 곳이 신과 악마를 모두 갖고 있는 압락사스란다.
이 책에서 기존의 세계관이란 선 만이 참인 기독교 세계관이고 동시에 주인공을 키워낸 낡은 규범들-아버지, 집, 종교, 도덕의 속박이다.
자신의 거짓말이 족쇄가 되어 불량청소년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주인공은, 갑자기 나타난 데미안에게 구원을 받는다.
데미안은 '카인과 아벨'이야기에서 카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들려주며 주인공을 일깨운다.
그 해석이란 요약하자면 카인은 용감한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 옆의 두 도둑에 관한 다른 해석도 결국
회개치 않은 도둑이 비겁하지 않아서 더 용감하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데미안에게 바로 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낸다.
이것은 기존의 세계에 머무르려는 주인공의 몸부림이었다.
주인공이 기존 세계관을 버렸을 때, 데미안을 다시 만났고, 데미안의 모친인 에바부인에게 인도된다.
에바부인은 이브이고 데미안은 데몬을 연상시킨다는 해설을 보고 나는 태초의 인간 아담이 생각났다.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
데미안은 기존의 세계관을 깨라고 속살거린다.
이 속삭임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압락사스'가 선과 악을 모두 갖고 있는 양면성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데미안이 압락사스라고 생각되는 건 나뿐이려나?
주인공 싱크레어는 데미안 덕분에 자기 자신을 찾았지만, 신(기존의 규범-아버지, 집, 종교, 도덕)은 잃었다.

p75~77 예를 들면 나비 종류 중에는 어떤 나방들이 있는데, 암놈이 수놈보다 훨씬 수가 적어. (중략)
그런데 연구자들이 자주 시험해 본 바로는, 이 나방들 중에 암컷이 하나 있으면 밤에 이 암컷에게로 수나방들이 날아오는데, 그것도 여러 시간 떨어진 곳에서 오는 것야, 여러 시간 떨어진 곳에서! 생각해 봐! 몇 킬로미터 밖에서 부터 이 모든 수컷들은 그 지역에 있는 단 하나의 암컷을 감지하고 추적해 오는 거야! 그것을 설명하려고들 하지, 그러나 그건 어려워. 그건 일종의 후각이거나 아니면 그런 무엇일 거야. 이를테면 좋은 사냥개가 눈에 뜨이지 않는 짐승 자취를 찾아내어 따라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이해하겠지? 그건 그런 일들이야, 자연은 그런 일로 가득 찼고, 아무도 그걸 밝힐 수 없어. 이런 말은 할 수 있겠지. 이 나방들에게서 암컷이 수컷처럼 흔했더라면, 수컷들의 코는 그렇게 예민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야. 수컷들에게 그런 예민한 코가 있는 것은 다만, 스스로를 그렇게 조련시켰기 때문인 거야.
어떤 짐승이나 사람이 자신의 모든 주의력과 모든 의지를 어떤 특정한 일로 향하게 하면, 그는 그것에 도달하기도 하지. 그게 전부야. (중략)
예를 들면 그런 나방이 자신의 뜻을 별이나 뭐 비슷한 곳까지 향하게 하려 했다면, 그건 이룰 수 없는 일이겠지. 다만 나방은 그런 따위 시도는 안해. 나방은 자기에게 뜻과 가치가 있는 것,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 자기가 꼭 가져야만 하는 것, 그것만 찾는 것야.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일도 이루어 지는 것지. 그는 자이 외에는 다른 동물이 갖지 못한 마법의 제6감을 개발하는 거야! 우리 같은 사람은 동물보다는 활동의 여지가 더 많을 것이고, 관심도 더 크겠지. 그러나 우리도 얼마만큼은 정말 좁은 테두리에 매여 있어서 그걸 벗어날 수 없어. 상상 같은 건 해볼 수 있지, 이런 저런 상상의 날개를 펼 수는 있겠지, 꼭 북극에 가고 싶다라든지, 혹은 그런 무엇을. 그러나 그걸 수행하거나 충분히 강하게 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소망이 내 자신의 마음속에 온전히 들어 있을 때, 정말로 내 본질이 완전히 그것으로 채워져 있을 때뿐이야. 그런 경우가 되기만 하면, 내면으로부터 너에게 명령되는 무엇인가를 네가 해보기만 하면, 그럴 때는 좋은 말에 마구를 매듯 네 온 의지를 팽팽히 펼 수 있어. 예를 들면 내가 지금, 우리 신부님이 장차 안경을 안 쓰시도록 힘써 봐야겠다고 한다면, 그건 안 될 일이야. 그건 그냥 장난이야. 그러나 내가, 그때 가을처럼, 저 앞에 있는 내 의자에서 자리를 바꾸어야 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게 되면, 그럴 때는 아주 잘되지. 그때 아파벳순으로 보아 내 앞에 앉아야 되는데 지금껏 아파서 등교하지 못해 자리가 없던 아이가 갘자기 나타났어. 그리고 누군가가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줘야 했고 물론 내가 그렇게 했지. 내 의지가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즉시 기회를 포착한 거지.

p142  우리 영혼도 일찍이 인간 영혼들 속에 살았던 모든 것을 지니고 있지. 그리스인들이나 중국인들에게서든 아프리카 토인에게서든 일찍이 존재했던 모든 신과 악마, 모두가 우리들 속에 함께 있어. 거이 있는 거야. 가능성으로, 소망으로, 탈출구로.

p163 우린 인간이야. 우린 신을 만들고 신들과 싸우지. 그러면 신들이 우리를 축복해.
:

조지오웰 1984

2019. 5. 22. 08:37


#조지오웰_1984
#정희성
#민음사

존재는 무엇일까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해준 책.
역자가 말했 듯 이 책은 전체주의라는 거대한 지배 시스템 앞에 놓인 한 개인이 어떻게 저항하다가 어떻게 파멸해 가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임.
전체주의 뿐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체제, 조직에 적용해도 될 정도로 탁월함.
난 이 책을 읽으며 특히 존재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음.
인간은 실체가 없지만, 존재한다고 믿는 것을 위해 여러가지 행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임.
내가 믿고 모든 사람들이 믿는다면 그 사상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 됨.
그래서 결국 종교는 위험하다 라는 생각에까지 닿았음.  ㅋㅋ(그래서 종교가 머릿수 싸움을 하는 거겠지..)
마지막에 주인공이 마음속으로부터 모든 사상이 바뀐 것 처럼 연기하다가 총살당하는 순간 모든 증오를 쏟아 붓고 죽는 순교자컨셉을 계획했지만, 보기좋게 실패함으로서 개인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나약한 존재인지 처절하게 느끼게 해줌.
 한낱 자신의 생각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는, 개인의 생각까지 통제하는 사회가 존재한다면 소름끼친다고 생각되지만, 요즘 스마트기기 시대가 좀 그렇게 가고 있는 건 아닌지, 내 생각이 진짜 내 생각이 맞는 건지, 존재하는건 실체가 있긴한건지 다시 생각해보게 해준 책임.


p52 그런데 이런 지식이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바로 그의 의식 속에, 여차하면 완전히 지워져 버릴 그의 의식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만일 사람들이 당의 거짓말을 믿는다면 -그리고 모든 기록들이 그렇게 되어 있다면- 그 거짓말은 역사가 되고 진실이 되는것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p59 그때 그때의 필요에 맞지 않는 기사나 의견은 기록에서 영구히 삭제되었다. 말하자면 모든 역사는 필요에 따라 깨끗이 지우고 다시 고쳐 쓰는 양피지 위의 글씨와도 같은 것이다. 일단 그 모든 과정이 완료되면, 어떤 경우에도 거기에 허위가 섞여 있다고 주장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었다.

p60 윈스턴은 풍요부의 숫자를 재조정하면서, 이런 일은 사실상 위조라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는 단순히 하나의 난센스를 또 하나의 난센스로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

p69 한 시간 전만 해도 생각조차 못했던 오갈비 동무의 존재는 이제 사실로 굳어졌다. 죽은 사람은 만들어낼 수 있지만, 산 사람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묘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p209 사임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는 과거에도 존재한 적이 없는 인물이다.

p356 옛날 전제군주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식이었고, 전체주의자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이었지만, 우리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는 식이네.

p368 독일의 나치와 소련의 공산당은 그 수법에서는 우리와 매우 흡사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동기를 인정할 만한 용기가 없었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한시적으로만 권력을 장악하겠다고 약속하고는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낙원이 도래할 것이라고 꾸며댔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믿기까지 했네. 우리는 그들과 다르네. 누구든 권력을 장악하면 그것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법이지. 권력은 수단이 아닐세. 목적 그 자체이네. 혁명을 보장하기 위해서 독재를 행사하는 게 아니라 독재를 하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는 걸세.

p370 "우리는 정신을 지배하기 때문에 물질도 지배할 수 있네. 실제란 머릿속에 있지.

p372  인간의 정신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념.

p389 오브라이언이 마루 위를 둥둥 떠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윈스턴 자신도 그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는 것이다.

p393 만약 비밀을 간직하려고 한다면 자신에게도 그것을 숨겨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p394 이단적인 사상은 영원히 그들의 손에 미치지 않는 곳에 있어 벌을 받지도, 회개를 강요당하지도 않으리라. 결국 그들의 완벽성에 하나의 구멍이 뚫리는 셈인데, 마지막까지 그들을 증오하면서 죽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이다.
:

호밀밭의 파수꾼

2019. 4. 29. 18:43

#호밀밭의파수꾼
#The_Catcher_in_the_Rye
#J_D_Salinger
#제이디샐린저
#민음사
#공경희

읽는 내내 주인공이 짜증나서 '미친놈 아냐?'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진짜 민친놈이었음.
심지어 맨 뒤에 작품해설도 없어.
그거만 기대하며 읽었건만.
#죽고싶지만떡볶이는먹고싶어 의 1950년 버젼이랄까.
뭐 이런 공감가는 상황이나 비슷한 심리 상태의 사람들이 보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 같긴 했음.
책 중간에 주인공이 호밀밭에서 지키고 있다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지지 못하게 도와주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래서 이 책 제목이 호밀밭의 파수꾼인 것 같음.
순수한 어린이의 세계를 지켜 주고 싶은 것과는 반대로 주인공은 더러운 어른들의 세계를 일부 경험해 보면서 타락의 일로로 들어서게 됨.
읽으면서 작가가 자기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닌지 의심했음.

p111 상류층이 아니면 상대도 하지 않는 그 인간처럼 음악도 그렇게 들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

변신

2019. 3. 22. 20:32

#변신
#프란츠카프카
#전영애
#민음사

주인공 그레고르는 어느날 아침 깨어났을때 혐오스러운 벌레로 변신해 있다.
어떤 벌레라는 이름은 안나오지만 여러 묘사를 봤을 때 바퀴벌레인 것 같다.
그 혐오스러움은 가족도 극복하지 못한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 지고 있던 사람이지만, 한 순간에 쓸모없고 혐오스러운 존재로 전락한다.
그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것을 기대하던 가족들은 몇달 후에도 여전히 벌레인 것을 보고, 그가 죽자 해방감을 느끼며 행복해 한다.
벌레로 변신 후 철저히 혼자된 외로움을 느끼는 주인공에서 여러가지를 느꼈다.
그 중 하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그 존재만으로 사랑받는가 라는 것이다.
쓸모 없어지면, 예를들면 무능력해 지거나 병이 들거나 정신이 나가거나 탈선하거나 범죄자가 되거나 한다면, 가장 가까운 부모님 조차도 존재만으로 사랑해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가족이 어느새 서로 요구하는 관계로 변질 됐다던데, 그런 것을 시사하는 것 같기도...
:

페스트

2019. 3. 16. 11:42

#페스트
#알베르카뮈
#김화영
#민음사

페스트를 읽는 내내 전쟁을 빗댄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는데, 작품해설 보니 페스트 집필 당시 전쟁 중이었고, 작가 거주하던 곳이 일시적으로 폐쇄 당해서 사랑하는 부인을 2년동안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함.
소설 속에서 페스트가 퍼진 도시는 폐쇄 당함.
시 안에 갖힌 사람들이 뜻하지 않는 이별을 겪으며 느끼는 심리상태가 잘 서술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작가가 직접 겪었기 때문인 듯.
페스트가 맹위를 떨칠 무렵 시민들은 계속되는 죽음에 감정이 매말라가고 그런 비정상이 일상이 되가는 모습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는데,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떠올랐음.
소설 인물 중 서술자인 리유는 의사이지만, 페스트에 대해 아무것도 모름.
그렇지만 자신의 맡은바 소임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음.
우리가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음.
페스트를 이용해 설교를 하던 신부도 결국은 페스트에 의해 죽게 됨. 신부도 결국 일반인과 다를 것없는 무지한 사람이었음.
종교는 이런 시국을 이용한다는 구절도 와 닿았음.
이 소설에서 주로 등장하는 4명이 결국 한명에서 분화한 느낌이 들었는데, 작품해설에 그 비슷한 설명이 나와서 재밌었음.

p73의사들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마침내 리샤르가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그 병이 페스트인 것처럼 대응하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표현은 열렬한 동의를 얻었다.

p159 '그렇다. 성스러움이라는 것이 온갖 습관의 총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p172
"네." 타루가 끄덕거렸다.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말하는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뿐이죠."
리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언제나 그렇죠.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싸움을 멈추어야할 이유는 못됩니다."
"물론 이유는 못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다면 이 페스트가 선생님에게는 어떠한 존재일지 상상이 갑니다."
"알아요." 리유가 말했다. "끝없는 패배지요."
중략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 드렸나요. 선생님?"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가난입니다."

가난이 리유를 계속된 패배에 맞설수 있는 가르침을 준 것 같아서


p173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말이지. 그런데 당신은 대체 무엇을 알고 계신지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 같은 권위를 가진 사람이라도 정확이 모를 수 있다.

p216  즉,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p237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들은 감정의 메마름 때문에 괴로워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p238 불행은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이며, 또 절망에 습관이 들어 버린다는 것은 절망 그 자체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p239 왜냐하면 모든 생이별당한 사람들이 그러한 상태에 이르렀던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같은 시각에 거기에 도달했던 것은 아니고, 또한 일단 그 새로운 심리 상태 속에 자리를 잡았다가도 섬광과 같은 명징함이나 미련이나 급격한 각성 등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더 싱싱하고 더 고통스러운 감수성을 되찾기도 했다는 것을 덧붙여 두어야겠다.

p251 그러나 그는 살려 주기 위해서 거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격리를 명령하기 위해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p253 그들은 결국 요행에 운명을 걸고 있었던 셈인데, 요행이란 누구도 바랄 수 없는 것이다.

p270 소독기에서 흡수성 가제로 만든 마스크 두 개를 꺼내서, 랑베르에게 그 중 하나를 내밀며 쓰라고 말했다. 신문기자는 그것이 무엇엔가 쓸모가 있느냐고 물었다. 타루는, 아무 쓸모도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직한 느낌을 주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p291 그래도 모든 일에는 언제나 취할 점이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가장 잔인한 시련조차도 기독교인에게는 역시 이득이 되는 법이다.

p292 그 어린애를 기다리는 영생의 환희가 능히 그 고통을 보상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그로서는 쉬운 일이겠으나, 실상은 그 점에 대해서 자기는 전혀 아는 바 없다는 것이었다.
:

유리알 유희1,2

2019. 3. 9. 15:10

#유리알유희
#헤르만헤세
#이영임
#민음사

유리알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 형식을 딴 소설.
요제프 크네히트가 실존 인물인 줄 알뻔.
유리알 유희도 작가가 만든 가상의 것임.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지식과 지혜들을 음악과 결합하여 상반되는 것들을 음양의 조화처럼 조화롭게 만드는 유희가 유리알 유희인 것 같음.
이 소설에서 유리알 유희 명인이 최고의 명인이며, 유리알 유희 명인이 되기 위해선 어릴적부터 엄선된 영재들을 카스탈리엔이라는 일종의 영제육성기관에서  엄격한 절제와 자기 수양으로 육성되어져야 함.
크네히트는 뛰어난 천성과 실력으로 명인으로 추대되고, 양극에 있던 속세적인물 데시뇨리와 재회하면서 극과 극의 문제를 잘 조화 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듯 함.
크네히트는 카스탈리엔의 위기를 느낌.
속세와 단절된 그들만의 리그가 된 카스탈리엔의 가치는 전쟁 같은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카스탈리엔의 존속보다 더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속세의 일에 재정을 쓰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게 되면 끝장날 것이라는 판단.
최고의 자리에 있던 명인은 명인 인장을 반납하고, 속세로 떠남.
그는 어린제자를 가르쳐 속세와 카스탈리엔의 조화를 꿈꿨음.
그러나, 구원자의 느낌으로 속세로 나간 그는 그 다음날 바로 죽음.

서문에서부터 격침당하는 그런 소설이라고 하는데, 진짜 서문 읽다가 난독증오곤 했지만, 본문은 읽을만했고, 작품해설 보니 서문을 마지막에 읽으라네
작품해설 부터 읽고 읽을 걸 후회됨.
다 읽고 느낀점은 헤세가 자신의 이야기를 녹여낸것 같다는 생각.
어릴적 영재학교를 다니다가 뛰쳐나갔다고 하는데, 카스탈리엔이라는 영재학교에 투영한 것 같고,
데시뇨리라는 세속 친구에게 정신세계로 빠져가는 자신의 내면에서의 극의 갈등을 묘사한 것 같기도.
 
p94 자유가 있다고 해 두지. 그러나 그것은 전공 선택이라는 그 한 가지 행위에 한정되어 있을 뿐이야. 그러고 나면 자유는 끝이지. 대학에서 공부를 할 때는 이미 의사나 법률가나 기술자가 되기 위해 꼼짝 못할 교과 과정으로 떠밀려 들어가고, 여러 시험을 치러야 간신히 그 과정을 끝내게 되네. 시험에 합격하면 면허장을 받고, 그러면 이제 다시 자기 전공대로 나아갈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그러나 그럼으로써 그는 저속한 힘의 노예가 되어 성공이니 돈이니 명예니 공명심이니 하는 것 따위에 매달리고, 남의 마음에 드는 일 따위에 좌우되게 된다네. 선거에 끼어들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계급과 가족과 파벌과 신문 따위의 가치 없는 경쟁에도 뛰어들지 않을 수 없지.

p106~107 신성은 개념이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네 안에 있어. 진리는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내야.

p143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삶은 전체가 하나의 역동적인 현상이다. 유리알 유희는 근복적으로 그 역동적 현상의 미학적인 측면을 파악하는 것이고, 그것도 주로 리드미컬한 진행 과정이라는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다."

p160 학생들에게 호메로스나 그리스 비극 작가들을 소개한다 해도 나라면 그들에게 작품을 신적인 것이 현상으로 나타난 형태라고 암시하는 게 아니라 언어 및 운율적인 수단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통해 그들이 작품에 다가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네. 교사와 학자가 할 일은 수단을 찾아내고 전해 내려오는 것을 보호하고 방법을 순수하게 지키는 일이지, 더 이상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체험을 자극하거나 촉진하는 게 아니야.

p218 "그렇습니다. 그러나 벵겔이 얻고자 한 것은 단순한 지식이나 연구분야의 나열이 아니라 어떤 통일체, 하나의 유기적인 질서였습니다. 공통분모를 구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바로 유희의 기본 사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p387 또 서로 간에 참으로 빈틈없는 친밀한 소통이나 이해가 가능한 두 인간은 세상에 결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도있고.

2권 144 소년이서서히 자기가 지닌 재능과 능력을 알아 가도록 만들고, 아울러 학문과 정신과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데 힘이 될 고귀한 호기심, 고상한 불만을 그의 마음속에 북돋워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이방인

2019. 2. 3. 10:50

#이방인
#알베르카뮈
#김화영
#민음사

쭉쭉 읽다가 갑자기 끝남.
뭐지? 어리둥절 했음.
처음 주인공 뫼르소의 심리상태가 나와 좀 닮았다 생각하면서 읽음.
그런데 뒤로 갈 수록 아랍인을 죽이고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소설 내에서도 피해자에 대한 애도나 동정을 느낄 수 없음.(하긴 형사제판에서의 초점이 피고인의 범죄 사실에만 맞춰 있긴 하지)
다만 주인공의 삶을 관통하는 이방인 스러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
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는 자신의 삶에서 한발짝 물러서 있는 인상을 줬음.
자신의 어머니 장례식도 미적지근한 감정으로 참여하고, 여자친구의 청혼에도 사랑하지 않지만 승낙하고, 아랍인을 쐈을 때도 별 감정없이 해치우고, 특히 이방인성이 두드러지는 부분은 재판정에서 인듯.
자신의 재판이지만 제 삼자로 물러나서 진행됨.
해설을 읽으니 그는 너무나 솔직하기 때문에 이방인이라고 함.
좀 유연하게 상황에 맞는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별로 할말이 없으므로 하지 않는 자기변호에 소홀한 모습을 보임.

작가가 사형(기요틴) 폐지의 선봉에 선 사람이라고 하는데, 아마 이 소설은 사법제도의 불합리성을 꼬집고 부각시키기 위함이 아닐까?

좀 이상했던 점은
백인인 주인공이 아랍인을 죽였는데도 사형선고를 받은 점이랑 (당시 아랍인은 식민지 시민이었다)
사건과 전혀 연관이 없이 보이는 주인공 모친 장례식과 연결해서 재판이 진행된 점이 이상함.

p161 따지고 보면 인간 세계에서는 정의(재판)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그 저으이는 필연적으로 그러한 외관들만을 보고서 판단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정의는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거짓되고 억지이며 왜곡된 것입니다.

p161 사방에서 꼬리표를 달려고 덤벼들고 천편일률적인 공식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고 관습에 따라 단죄하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어떤 기나긴 재판입니다.

p162 그가 파멸하게 되는 것은 웅변적인 수사를, 어떤 유의 언어상의 낭만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p178 이리하여 새로운 소설 [이방인]은 중성적인 톤, 문장과 문장 사이에 가로놓인 "침묵", 심리 분석이나 설명을 피하고 오직 겉으로 보이는 구체적인 대상들만을 묘사하고 지시하는 고집스러운 태도, 일견 순진해 보이는 구어체의 단순과거 등을 통하여 "겉보기에 아무 의식이 없는 한 인간" 특유의 무심한 모습을 가장 적게 말하면서 암시적으로 그려 보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p206 이 죽음은 소설의 1부와 2부 사이의 대칭 관계를 드러내는 하나의 지표라는 점에서는 다른 두 가지 죽음과 동일한 기능을 하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른 두 죽음과 다르다. 우리는 재판 과정이나 감옥에 갇힌 뫼르소의 의식 속에서 살해당한 아랍인이나 그의 가족들은 거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설의 전 공간을 굽어보는 듯한 화자의 시야 속에서 이 아랍인은 충분한 인격체로 형상화 되지 못하고 있다.
중략
왜 뫼르소의 행동이 그 가해행위에 대한 정당방위였다고 충분히 항변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알제는 프랑스 식민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타자"인 아랍인을 '우연히' 살해하게 된 백인 뫼르소에 대하여 사형이라는 가혹한 형벌을 내린 것도 당시의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이해하기 어렵다.
:

달과 6펜스

2018. 10. 30. 13:53

#달과6펜스
#서머싯몸
#송무
#민음사

'달과 6펜스'라는 제목의 뜻을 안 것 만으로도 큰 수확이 있었던 책.
유명해서 제목은 많이 들었는데, 제목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었음.
달은 이상세계 6펜스는 가치가 낮은 은화로 현실 속세를 상징한다고 함.
서머싯 몸은 고갱의 삶에 영감을 얻어 소설로 쓰고 싶어서 타이티 섬도 답사하고 연구를 했다고 함.
이 소설의 주인공은 고갱을 모델로 했지만, 고갱과 비슷한 듯 다른 삶을 삼.
부유하게 살던 주식중계인 스트릭랜드는 어느날 갑자기 그림에 대한 열정에 휩싸여 모든 것을 버리고 잠적함.
그러면서 서사로 쓸 만한 어떤 것을 그림으로 표현해 내고자 자신을 불사름.
가난과 세간의 멸시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음.
자신의 욕망,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정점에 오르고자하는 욕망을 위해 일견 이기적으로 보이지만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닐 수도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감.
내가 할 수 없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는 주인공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인기를 끌었을 거라는 평을 보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 했음.
:

#나는마흔에생의걸음마를배웠다
#신달자

신달자씨의 에세이+시
자신의 불행했던 삶을 절절히 그려냈음.
에세이에 시가 있으니 맥락이 이해가 가서 시가 더 와 닿는 듯.
남편이 갑자기 지주막하출혈에 걸려 쓰러져 23일동안 혼수상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면 씼은 듯이 나을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 고생시작.
에세이에서 차라리 죽는게 나을 병이라고 회고하고 있음.
저자는 부자집 딸로 태어나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에세이에서 자세히 다루지 않았지만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한듯함.
남편을 살리고 재활했던 마음 한켠에는 자존심도 있었다고 고백했음.
남들이 '달자는 결국 저렇게 사는구나'라는 손가락질이 정말 싫어서 이를 악물고 남편의 부활을 위해 헌신했다고 함.
남편은 23일만에 눈뜨고 정신이 좀 이상해지더니 자기만 아는 사람이 되어 저자를 종처럼 부리고 짜증을 내며 종국에는 자살하려고 시도를 거듭하고 폭력까지 행사했음.
그런걸 다 참아내고 재활치료며 병간호며 열심히 하여 남편을 다시 강단에 세웠음.
남편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이 서야겠다 다짐하고 대학원에 다님.
그 와중에 모시고 살던 시어머니가 허리가 부러짐.
그러고도 10년을 더 사셨다고함.
돌봐야할 아이 셋에 온전치 못한 남편과 병수발 받으며 누워지내는 시어머니까지 모시며 저자는 치열하게 살아냈음
어떻게 보면 죽는게 더 쉬웠을 수도 있는 상황.
이제 남편도 죽고 혼자 살며 외로움을 느끼며 남편의 빈자리를 허전해함. 일상적인 시시한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다는 부재.
이 책을 읽으며 영혼들의 여행이 떠올랐음.
난 그 세계관을 믿기로 했으니까.
저자의 영혼의 성장을 위해 남편이 노력했다고 생각함.
[나는천국을보았다]의 저자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영혼이 있음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저자의 남편의 사명은 아마 저자의 영혼을 키우는 일이었을지도.
저자가 그냥 평탄하게 살았다면 지금같은 깊은 영혼을 갖은 사람이 되었을까?
저자는 포기하지 않고 어려움을 극복함으로 인해 영혼의 성장이 있었을 것 같음.
그 절절함이 글로 엮여 나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았겠나?

p7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인간에게도 생의 단 한 번은 완전한 주목을 받으며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중략)
가족이란 때때로 위선의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때가 있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가족이 그 죽음을 지킨다. 그래서 가족보다 더 가까운 관계는 없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니 그렇더라고.

p11 나는 그 순간 죽음에 대해 명언을 남긴 위인들을 저주했다. 그리고 더러는 그 명언을 인용하며 지식의 빈곤을 채우기라도 한듯이 만족해하는 나와 많은 사람들의 위증에 몸서리쳤다.

p48 물론 그는 내가 들고 있다는 사실에 미안함이 없었다. 당당했다. 남자는 붉은 가방을 들면 탁 죽어버리니까.

p51 그는 개도 좋아했지. 나무와 개를 좋아하는 사람, 얼른 들으면 멋있고 뭔가 예술이 느껴질 것 같은 그런 남자에게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나무와 개보다 사람을 잘 모르는 인간이라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p53 지금 생각하면 우리는 두 사람 다 같은 존재들이었을 거야. 무서운 것은 이미 우리는 사랑해서 만나 서로를 증오하는 관계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나무와 개를 좋아하면서 아내를 모르고, 모차르트와 그림과 영화를 좋아하면서 남편을 모른다고 생각한 점은 둘이 같을지도 모를 일이야.

p57 아기도 낳아 봐야 해. 아기를 낳아 본 여자, 여자에서 어머니가 된 여자는 이 세상에서 이길 자 없을 거야. 낯선 남자 앞에 가랑이를 있는 대로 벌리고 생명을 내어 놓고 생명을 얻는 여자가 무엇이 두렵겠니? 여자는 그렇게 무너져 봐야 해. 그렇게 부서지고야 사랑을 아는지 모르지.

p218 푸른 하늘 위로
흰 나비가 날아오른다.
생전에 단 한 번도 날아오르지 못한
그 남자가
그의 삶이 뼈까지 으깨어져서야
드디어
광막한 하늘 위로
수천의 나비 떼로
날아오른다.
봐요
당신도 이렇게 날아오르는 때가 오네요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니 어때요
당신이 있던
그 어둡고 춤던 땅
조금은 따뜻하게 보이나요
나비 한 마리 날아오른다
훨훨훨 거칠 것 없는 탁 트인 하늘을
주머니 없는 천사 옷 입고
유유히 날아오른다

p256사람들은 아직 벗어날 방도가 있는데도 너무 일찍 절망하는지 모른다. 인간은 희망에 속는 일보다 절망에 속는 일이 더 많다.
:

남아 있는 나날

2018. 4. 19. 11:16

#남아있는나날
#The_Remains_of_the_Day
#가즈오이시구로

이 책을 읽는 후반부까지 이게 무슨 이야기지 싶었음.
끝에 김남주씨가 쓴 작품해설을 읽을까 말까 엄청 고민하게 만든 소설.
줄거리는 충직하게 주인을 섬기는 집사 이야기인데, 그가 35년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섬기던 주인은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주인 미국의 신흥부자가 영국의 고풍스런 집과 함께 "일괄거래"로 집사까지 구매한 상황.
일괄거래 목록 중 하나였던 집사 스티븐스가 주인공.
스티븐스는 새 주인의 허락으로 생애 처음 일주일간 여행을 떠남.
그 여행의 목적에는 예전 함께 일했던 켄턴양을 이를테면 썸녀를 만나는 것이 포함되어 있음.
그러면서, 스티븐스는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함.
대충 이런 줄거리인데,

스티븐스가 과거를 회상하며 위대한 집사와 그냥 그런 집사를 설명하며 자신은 위대한 집사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라고 자부심 넘쳐함.
위대한 집사란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하는데, 그 품위란 어떤 일을 당해도 당황하지 않고 본연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을 일컷는다고 함.
일례로 스티븐스의 아버지가 사망하던 날 스티븐스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자기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는 회상을 하며 품위란 그런 것이라고 독자를 설득 시킴.
이 부분에서 대충 스티븐스가 어떤 인물인지 감이 잡힘.(일본 만화에 자주 나오는 집사 같은 느낌)
그리고 달링턴가의 총무로 일했던 켄턴양과 썸 탔지만,   직무상 그녀를 떠나 보냈음.
여기서 직무상 실존과 자기자신의 실존 중 직무상 실존만을 추구했던 주인공의 애잔함이 느껴짐

그리고, 결국 충직하게 모셨던 옛주인 달링턴 경은 나치에 동조했다는 불명예를 안고 세상을 떠남.
그래서 그런지 스티븐스는 전 주인과 엮이는 것을 극히 꺼려함.
옳지못한 일을 했던 주인과 동일시 되기 싫어하는 것을 자기 자신 내부에서도 미약하게나마 알고 있는 듯함.
그러면서도 달링턴 경이 나치와 가담할 때 행했던 달링턴경에 대한 충성을 회상하며 품위란 그런 것이라고 자기변호를 하고 있음.
그러나 성실하게 자기 직무를 수행했다고 해서 죄가 성립되지 않는 것은 아님.

김남주씨의 작품해설을 발췌하면
 306p"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성실하게 일상을 반복함으로써 악을 돕고 악에 이용당하는 범인들의 삶, 그 소름끼치는 관성의 폐해에 대해 말한다. 600만여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는 데 앞장선 전범 아이히만은 도착적이고 가학적인 성향을 지닌 괴물이 아니라 명령에 복종하고 근면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스티븐스가 이대한 집사였다면, 아이히만은 좋은 아버지, 자상한 남편, 성실한 직업인이었다."

주인공이 달링턴경에게 행했던 헌신이 안쓰러운 헛수고쯤으로 여겨지기때문에 자기변호를 하고, 위대한 집사의 자질에 대해 집착적으로 이야기 하는지도 모르겠음.

고대했던 켄턴양과 재회 후, 여행을 마무리 지으며 돌아오는 배 위에서 주인공은 아름다운 석양을 누리는 대신 할일을 생각한다.
얼마남지 않은 인생을 위대한 집사인 자신에게 유일하게 부족한  농담과 유머의 기술을 발전시켜 새 주인과의 관계를 더 잘 이끌어 보겠다는 다짐이 그것이다.

여기서 켄턴양은 지난날의 사랑때문에 방황도 했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안정적인 노후를 보내겠다고 다짐하고,
스티븐스는 농담과 유머를 익히겠다고 다짐함.
김남주씨의 평을 빌리자면, 그가 삶 전체를 회상한 후에 내린 결론 치고는 정곡을 벗어나 있어서 애잔하고 안타깝다고 느껴짐.

308p "하지만 여행 여섯째 날 저녁 바닷가 마을 웨이머스에서 석양 앞에 앉은 스티븐스는 그 좋은 저녁을 누리는 대신 할 일을 생각한다.
자신에게 부족한 농담과 유머의 기술을 발전시켜 새 주인과의 관계를 더 잘 이끌어가 보려는 것이다. 실제로 스티븐스는 여러 차례 위대한 집사로서의 자신의 자질에 거의 유일한 단점인 부족한 농담실력에 대해 일화와 함께 언급하고 있다. 그가 주인의 부탁을 받고 자연의 이치를 깨쳐 주려 했던 젊은 카디널에게 오히려 통렬한 지적을 당하는 부분에서 독자는, 스티븐스에게 부족했던 것은 농담 실력이나 유머 감각이 아니라 사태 인식 능력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09p "무수한 매듭 끝에 도달한 스티븐스의 이런 궤도 수정은 그의 삶 만큼이나 정곡을 벗어나 있고, 하루의 끝 무렵에 삶 전체를 돌아보고 도달한 결론치고는 미흡하고 안쓰럽다."

*이 책 읽고 느낀 점
성실함도 죄가 될수 있구나.
고위공직자 최측근 비서가 느낄 감정 같음.
난 나의 직무를 성실히 완벽하게 해냈다.
그런 어려운 문제는 저 윗분들이나 토론하는 것이지, 나는 내가 맡은 직무만 성실히 수행하면 된다.
이런 마인드를 갖은 비서들이 얼마나 효용성 있었겠는가 저 윗분들에게는.
젊은 카디널경에게 잘못된 일에 가담하고 있다는 충고를 들었음에도 주인공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 직무를 완벽히 하는데만 집중할 뿐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자기합리화 하는 것을 보면 은연 중 자기가 잘못했음을 느끼고는 있는듯.
어쨌던 나도 주인공이었다면, 내부고발자가 될 수 있을까 의문스럽긴 함.
자기 목소리를 냈던 젊은 카디널 경은 전쟁에서 전사했다고함.
이것도 시사하는 바가 있는게, 우리 사회의 변혁을 위해 목소리를 냈던 사람들은 일찍 죽었음.
한 자리 차지한 사람들은 대부분 충직한 기회주의자들인 듯.
그래서 사회가 아주 천천히 변하는가 봄
:

BLOG main image
by 팜츄리

공지사항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602)
시아준수 (52)
상품리뷰 (101)
책리뷰 (271)
민사,신청서류 양식 (3)
기타 뻘글 (23)
음식점 리뷰 (53)
대충레시피 (38)
드라마리뷰 (53)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

달력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otal :
Today : Yesterday :